시내산 - 십계명을 받다

이렇게 광야에서 여러가지 난관을 만날 때마다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는 하나님이 오라고 하신 시내산까지 이끌고 옵니다. 왜 시내산 이었을까요? 1. 시내산은 어디일까요? 시내산은 시내 반도에 있는 '예벨 무사' 로 알려져 있는데 일부 사람들은 아라비아 쪽에 있는 알 라우즈 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알 라우즈 산이나 시내 반도의 예벨 무사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바위 산이며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힘든 곳입니다. 그런데 알 라우즈 산이라고 한다면 홍해가 370km 정도 떨어진 누에바 근처가 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서 3~4일 만에 홍해에 도착하는데 말을 탄 군인들도 아니고 어린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짐승들까지 함께 가는 거리로서는 도저히 그 시일에 도착 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2. 시내산에 도착했어요. 출 19:1 이스라엘은 자손들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세는 시내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무교절 첫날인 1월 15일에 애굽을 출발해 3월 1일에 시내산에 아래에 도착하고 애굽을 나온 지 50일 정도 즉 오순절날 시내산에서 모세가 언약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주 중요한 일을 진행하시려고 합니다.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제안을 하십니다. 세계 열방을 향하여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제안 하시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데 어때? 지킬래? 거절할래? 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당하게 '아멘...

하스몬 왕조와 헤롯가문

이미지
 마카비 혁명으로 세워진 하스몬 왕조는 예루살렘 동남쪽의 에돔 지역까지 정복하며 융성해집니다. 그런 하스몬 왕조에게 조공을 바치던 에돔의 헤롯 가문이 세계의 흐름이 로마에 있음을 파악하여 하스몬 왕조를 배반하고 로마에 붙습니다. 결국 에돔 총독 안티파터(헤롯이 아버지)는 로마의 폼페이우스를 도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 일조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때부터 로마와 헤롯 가문의 이중 지배 구조를 겪게 됩니다. 1. 유대의 왕이 된 헤롯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에는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유대인이 1만 2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하스몬 왕조의 두 아들 싸움에 중재 역할을 한다는 명목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그중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가족들을 모두 포로로 로마로 데려가고 힐카우스 2세를 남겨 자기네 맘대로 대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유대가 정복한 에돔, 사마리아, 갈릴리, 데카폴리스등을 모두 독립 시켜 원주민들에게 돌려 줍니다. 이시기에 에돔인 헤롯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와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정치적 술수와 아첨을 통해 유대를 다스리는 '왕'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는 힐카우스가 다스리던 갈릴리 이두매 사마리아까지 다스리는 권한을 얻어 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헤롯을 싫어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어 여러 부인이 있음에도 하스몬 왕가의 공주인 마리암네와 또 결혼합니다.  대헤롯과 마리암네 이야기는 요세푸스 유대고대사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던 헤롯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유대 공주였던 마리암네였다고 합니다. 헤롯이 이 여인을 너무 도 사랑해 그가 로마로 옥타비아누스를 만나러 갈 때는 목숨을 건 위험을 감수하고 가는 길이었으므로 혹시 자신이 로마에서 무슨 변을 당하거든 마리암네를 바로 죽이라고 시종에게 명령을 내려놓고 갔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

로마와 유대의 관계

이미지
유대 민족은 오로지 하나님을 믿은 신앙 때문에 다른 이방 민족들의 문화나 종교를 가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기 위해  로마가 주는 시민권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 로마와 유대 관계 유대인들은 로마 시민권을 갖게 되면 파격적인 세금의 면제와 로마의 법에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등 여러가지 이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이 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시민이 되면 하나님이 주신 유대의 전통, 조상 대대로 지켜온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고 또 모두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어디에 살든지 1년에 2드라크마를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세로 바쳤으며. 그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1년에 한번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을 방문하는 성지순례도 자신들이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의무처럼 여겼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의 정체성은 그들이 속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이방 신들의 종교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유독 예루살렘 성전에 만은 아내 리비아와 함께 헌금을 했다고 전합니다. 또 유대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사법권을 허용하였습니다. 안식 일을 유대의 전통대로 지킬 수 있도록 하였으며 본인이 원하면 군대도 면제해 주었지요. 단지 사형 제도 만은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의 허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빌라도 총독이 재판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는 유대인들의 자극을 피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수호하기 위한 군사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좀 떨어진 가이사랴에 주둔 시켰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헬라인들과 동등하게 무역과 장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며 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황제 옥타비아누스

이미지
 카이사르는 최초로 로마를 통일한 인물이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어요. 그는 황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카이사르(가이사)라는 이름은 곧 황제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카이사르의 모든 재산은 그의 양 아들 옥타비아누스에게 가게 되는데 그 중 일부는 로마 시민들에게 일정 금액이 상속됩니다. 이렇게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까지 상속을 받게 되니 로마 시민들이 카이사르를 잊을 수 있을까요? 원로원들은 로마를 구하려고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했지만 상속자로 사랑받은 로마 시민들은 그를 죽인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양 아들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세우게 됩니다. * 2차 삼두정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군 사령관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원로운 의원인 레피두스를 끌어들여 2차 삼두 정치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레피두스는 바로 실각하고 이탈리아 스페인 갈리아등 서방은 옥타비아누스 발칸반도 소 아시아 시리아 이집트등 동방은 안토니우스가 관할하며 양자 대결로 가게 됩니다.  1)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 길에 오르면서 소 아시아의 다소(타르소스)성에 머물게 되는데 그 다소의 백성들이 안토니우스에게 많은 후원과 도움을 주게 되고 안토니우스는 그 보답으로 로마 시민권을 다소의 시민들에게 주게 됩니다. 추측 하건 데 사도 바울의 가문도 이 때 시민권을 받지 않았을까요. BC 41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집정관의 지위로 클레오파트라를 다소에 부릅니다. 이유는 카이사르의 암살을 도왔다는 죄목을 추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오는 클레오파트라는 죄인이 아닌 이집트의 여왕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며 다소 성에 입성합니다. 28살의 클레오파트라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42살의 안토니우스를 사로 잡습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말지요.  당시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인 옥타비아를 아내로 두었던 안토니우스는 아내를 버리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거처 하면서 클레오파트라와 다시 결혼을 하게 되며 3명의 자...

로마의 1차 삼두정치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이미지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정복한 나라에서 들어오는 노예들과 또한 곡물들로 인해 로마 자체에 있던 자영 농민들이 몰락하고 라티푼디움이라는 대농장이 유행하게 됩니다. 몰락한 자영 농민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몰려들면서 로마 사회의 산업은 불안한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농민들의 몰락에 반해 새로이 떠오르는 직업이 생겨나게 되지요. 해상 무역으로 돈을 버는 해상 무역업자, 고리대금업자, 세금징수원, 군무기를 납품하는 업자 등 이들은 새로운 부유층으로 떠오르면서 헬레니즘 문화와 합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1. 스파르타쿠스의 난 BC 73년 캄파니아 지방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70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하여 일으킨 반란입니다. 스파르타쿠스는 오늘날 불가리아 남서쪽 트라키아 출신으로 로마군의 포로로 잡혀 검투사로 팔려갑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검투 도시 캄파니아의 최강자로 이름을 날렸으나 아무리 유명해도 겨우 귀족들의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처음에는 70명 검투사들과 시작했지만 여기에 노예들이 합세하여 그 규모는 7만 명에서 10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노예 매매와 검투사 경기 등으로 검은 부를 쌓은 크라수스에 의해 진압되고 크라수스의 진압 군은 반란군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십자가 형으로 매달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도망간 남은 세력들은 결국 폼페이우스 군대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어 스파르타쿠스의 난은 2년 만에 종결됩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난 후로도 한동안 검투사 경기는 계속 되는데 종종 기독교인들이 검투사 경기의 잔인 성과 폭력성을 폭로하기도 합니다.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가 된 4세기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검투사 경기는 폐지되고 검투사 양성소도 사라지게 됩니다. 2. 로마 이야기 BC 60년 경 로마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하여 군사 천재인 폼페이우스와 그 시대의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제 1차 삼두정...

3차 포에니 전쟁

이미지
 2차 포에니 전쟁이 로마의 승리로 끝났지만 한 사람의 영웅을 만들어 내었지요? 바로 카르타고의 한니발 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철저히 패하고 영웅 한니발도 죽었습니다.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게 된 카르타고인데 로마와 카르타고의 3차 포에니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걸까요? 1. 3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는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댓가로 1차 때 보다 훨씬 많은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허락이 없이는 어떤 이유로 누구와도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사실상 카르타고의 모든 군대를 해산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카르타고 바로 옆에 누미디아가 있었습니다. 누미디아는 카르타고의 동맹국으로 전쟁 때마다 용병들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누미디아가 보니 자신들을 꽉 잡고 있던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누미디아는 때를 놓치지 않고 카르타고로 부터 독립을 위해 도발합니다. 로마와의 약속 때문에 꾹 참고 있던 카르타고는 자꾸 도발하는 누미디아를 참고 참다가 어쩔 수 없이 맞서게 됩니다. 누미디아는 바로 이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로마의 도움으로 자신들이 독립을 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카르타고가 누미디아를 상대로 전쟁을 한 사실을 알게 된 로마는 왜 조약을 어겼느냐고 꼬투리를 잡으며 카르타고를 침공합니다.  2. 역사에서 사라진 카르타고 2차 포에니 전쟁 시 한니발의 대륙 침략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로마는 한니발의 나라 카르타고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카르타고를 침범한 로마는 그 동안 참고 있었던 속내를 군대만이 아닌 카르타고에 사는 일반 시민들까지 참혹하게 학살하면서 드러냅니다.  당시 카르타고 시민이 25만 명 정도 였다고 하는데 그중 20만 명은 로마 군에 의해 죽고 살아남은 5만 명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한 때 지중해를 주름 잡으며 번영을 누리던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카르타고는 이렇게 로마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고...

2차 포에니 전쟁

이미지
포에니 전쟁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요? 바로 한니발 장군입니다. 알프스 산을 넘으며 그 용맹을 떨치던 한니발 장군이 없는 포에니 전쟁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요. 한니발의 등장과 승승장구로 2차 포에니 전쟁은 시작 되고 또한 한니발의 패배로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1. 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이 등장하는 2차 포에니 전쟁은 BC 218년 ~ BC 201년까지 16년 간 진행된 다른 말로 '한니발 전쟁' 이라고 합니다. 2차 포에니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납니다. 1차는 카르타고 근교에서 일어난 해상 전투였다면 2차는 대륙에서 일어난 대륙 전쟁이었으므로 로마에게 아주 유리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로마 군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이탈리아에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한니발의 군대는 카르타고인 에스파냐인 그리고 골 족인 용병들이었습니다. 여기에 당대 최강인 누미디아의 기병대도 있었고 한니발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이끌었던 코끼리 부대도 있었습니다. 한니발 부대가 알프스를 넘어 왔을 때는 6만이었던 군인들이 2만 6천명으로 줄었고 코끼리는 한 마리만 살아남아 이탈리아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2. 칸나에 전투 - 초승달 전법 BC 216년 한니발을 포에니 전쟁의 영웅으로 불리게 만든 칸나에 전투가 이탈리아 남부에서 일어납니다. 9만이나 되는 로마 군이 5만 밖에 안되는 카르타고 군에게 포위되어 무차별 하게 학살 당한 전투입니다. 한니발이 이 칸나에 전투에서 사용한 전술이 그 유명한 초승달 전술 입니다. 초승달 전법은 로마 군인들이 밀고 들어올 때 한니발의 군인들은 가운데가 불룩 나오게 하는 초승달 대형을 만듭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가운데로 밀고 들어올 때 일부러 중앙의 불룩 나온 대형은 뒤로 밀리도록 하고 양 날개에 있는 군인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앙의 군인들이 문을 열어주듯 뒤로 물러나면서 로마 군인들이 안으...

1차 포에니 전쟁

이미지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는 BC 732년 경 로무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에 의해 세워져 약 500년 가까이 귀족과 평민 사이의 계급 투쟁을 겪으며 그들 스스로 법 기반 위에 기틀을 다져가고 있었습니다. BC 264년 로마는 굉장히 풍요롭고 해군력이 막강하여 북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무대로 700년 가까이 영화를 누려온 대표적인 국가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섬을 놓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포에니 전쟁'입니다. 1. 포에니 전쟁의 발단 포에니 전쟁은 BC 264년에서 BC 146년 사이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을 말합니다. '포에니 란 말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 이라는 뜻이 랍니다. 이것은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도시였으므로 로마인들이 카르타고를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초창기 로마는 해상 국가 카르타고와는 전혀 충돌이 없었습니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대륙 국가였고 카르타고는 바다에서 배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는 해상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카르타고의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의 작은 나라 시라쿠사의 아가토클레스 왕 시절 그를 섬기던 이탈리아인 용병 마메르티니가 아가토클레스 왕이 죽은 후 그리스의 식민지인 같은 시칠리아 섬에 있는 메시나 시를 점령한 것이 발단이 됩니다.  마메르티니 용병들은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메시나 시에 가까이 가서 그들이 잠시만 머물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됩니다. 메시나 시민들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휴식 할 수 있는 거처도 주고 식량도 풍성히 제공해 줍니다. 근거지 없이 떠돌아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용병들은 친절한 메시나 시민들에 의해 평안해지자 다른 마음이 든 것입니다. 그들은 깊은 밤에 평화로운 메시나 시민들을 기습 공격하여 모든 남자들을 죽여버리고 여자들은 포로로 잡아 자신들의 아내로 삼아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용병들은 메시나 시를 거점으로 하여 주변 도시들을 약탈하며 해적질까지 하게 됩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