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모형 성막2(성소와 지성소)

 4가지의 덮개로 덮여진 성소는 거룩한 장소로 하나님이 보좌를 의미합니다. 성소는 이동이 가능합니다. 긴 널판을 이어서 만들었으며 가로는 30규빗, 넓이는 10규빗, 높이 10규빗입니다. 성소안에는 또 다른 10규빗의 정사각형 방을 만들고 이곳을 지성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1. 성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성소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떡상이 놓여 있고 왼쪽으로 일곱 개의 금촛대가 있으며 문에서 마주 보는 가운데에는 금향단이 있고 그 뒤로 휘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1) 떡상 진설병을 두는 상은 길이 2규빗, 넓이 1규빗, 높이 1.5규빗으로 12개의 무교병이 진설됩니다.  이 떡은 안식일마다. 새로운 떡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 떡상은 신 광야의 만나를 형상화 했으며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출 25:23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출 25:24 순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 테를 두르고 출 25:30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2) 등잔 대 등잔 대는 금촛대라고도 하는데 살구 꽃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원어로는 '솨케드' 라고 하는데 이는 '지켜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어 비추고 계심을 말합니다. 출 25:31 너는 순금으로 등잔 대를 쳐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 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출 25:34 등잔 대 줄기에는 살구 꽃 형상의 잔 넷과 꽃 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출 25:36 그 꽃 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결하여 전부를 순금으로 쳐 만들고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를 말하고 일곱 등불은 성령을 말합니다. 3) 금향단 성소 가운데 지성소 휘장 앞에 놓인 금향단은 길이가 1규빗, 넓이가 1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고 높이가 2규빗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금향단을 성소안 떡상이나 등잔 대를 만들 때 같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소 ...

하스몬 왕조와 헤롯가문

 마카비 혁명으로 세워진 하스몬 왕조는 예루살렘 동남쪽의 에돔 지역까지 정복하며 융성해집니다. 그런 하스몬 왕조에게 조공을 바치던 에돔의 헤롯 가문이 세계의 흐름이 로마에 있음을 파악하여 하스몬 왕조를 배반하고 로마에 붙습니다. 결국 에돔 총독 안티파터(헤롯이 아버지)는 로마의 폼페이우스를 도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 일조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때부터 로마와 헤롯 가문의 이중 지배 구조를 겪게 됩니다.



1. 유대의 왕이 된 헤롯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에는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유대인이 1만 2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하스몬 왕조의 두 아들 싸움에 중재 역할을 한다는 명목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그중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가족들을 모두 포로로 로마로 데려가고 힐카우스 2세를 남겨 자기네 맘대로 대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유대가 정복한 에돔, 사마리아, 갈릴리, 데카폴리스등을 모두 독립 시켜 원주민들에게 돌려 줍니다. 이시기에 에돔인 헤롯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와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정치적 술수와 아첨을 통해 유대를 다스리는 '왕'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는 힐카우스가 다스리던 갈릴리 이두매 사마리아까지 다스리는 권한을 얻어 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헤롯을 싫어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어 여러 부인이 있음에도 하스몬 왕가의 공주인 마리암네와 또 결혼합니다. 

대헤롯과 마리암네 이야기는 요세푸스 유대고대사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던 헤롯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유대 공주였던 마리암네였다고 합니다. 헤롯이 이 여인을 너무 도 사랑해 그가 로마로 옥타비아누스를 만나러 갈 때는 목숨을 건 위험을 감수하고 가는 길이었으므로 혹시 자신이 로마에서 무슨 변을 당하거든 마리암네를 바로 죽이라고 시종에게 명령을 내려놓고 갔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마리암네에게 집착했던 헤롯은 유대인들이 그녀와의 사이에서 난 자녀들만 지지하고 장모인 알렉산드라가 헤롯을 몰아 내려하자 자신과 마리암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죽이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결국 마리암네도 죽이게 되지요. 그 후 마리암네를 못잊어 병에 걸립니다. 
후에 마리암네의 손자인 아그립바가 헤롯을 피해 도망가던 중 로마황제의 도움을 받아 유대의 분봉 왕이 되어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충 먹어 죽은 헤롯 아그립바 왕입니다.

헤롯은 자신이 에돔인이라는 것이 컴플렉스였나 봅니다. 그는 유대인의 피를 갖고 싶어 했으니 말입니다. 

2. 헤롯의 치세

헤롯은 유대의 왕이 되어 자신을 싫어하는 유대인들에게 강경한 입장과 동시에 회유책을 폅니다. 그 회유책의 하나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헤롯 성전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피난민들이 세운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아주 초라하였습니다. 헤롯은 예루살렘에 화려하고 멋진 대 성전을 건축 함으로써 에돔의 피가 섞인 자신을 증오하는 유대인들에게 화해를 시도하였습니다.
또한 동시에 헤롯은 자신을 유대의 왕으로 세워준 옥타비아누스에게도 잘보이기 위해 유대의 해변에 신생도시 가이사랴 즉 카이사르의 도시를 지어 바칩니다. 헤롯은 로마의 황제 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도 친하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사 친구 아그립파와 옥타비아누스의 견제 세력이었던 안토니우스와도 친구였습니다. 이들 뿐 아니라
헤롯은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버지 카이사르와 친하게 지낼 때도 카이사르의 라이벌이었던 폼페이우스와도 친했습니다.  이렇게 헤롯이 로마의 지도자들과 친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많은 뇌물을 바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헤롯의 행동으로 클레오파트라가 그렇게 유대를 다스리게 해 달라고 안토니우스를 졸라도 안토니우스가 유대를 클레오파트라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은 바로 자신의 친구인 헤롯이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을 압박해서 얻은 막대한 부를 이용해 정치적인 친분을 만들고 자신이 얻고자 했던 것을 얻은 것이지요. 유대의 왕의 자리 말입니다. 

헤롯은 BC 37-4년 까지 유대를 다스립니다. 그의 통치 말년에 예수님이 탄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