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정복한 나라에서 들어오는 노예들과 또한 곡물들로 인해 로마 자체에 있던 자영 농민들이 몰락하고 라티푼디움이라는 대농장이 유행하게 됩니다. 몰락한 자영 농민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몰려들면서 로마 사회의 산업은 불안한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농민들의 몰락에 반해 새로이 떠오르는 직업이 생겨나게 되지요. 해상 무역으로 돈을 버는 해상 무역업자, 고리대금업자, 세금징수원, 군무기를 납품하는 업자 등 이들은 새로운 부유층으로 떠오르면서 헬레니즘 문화와 합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1. 스파르타쿠스의 난
BC 73년 캄파니아 지방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70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하여 일으킨 반란입니다. 스파르타쿠스는 오늘날 불가리아 남서쪽 트라키아 출신으로 로마군의 포로로 잡혀 검투사로 팔려갑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검투 도시 캄파니아의 최강자로 이름을 날렸으나 아무리 유명해도 겨우 귀족들의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처음에는 70명 검투사들과 시작했지만 여기에 노예들이 합세하여 그 규모는 7만 명에서 10만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노예 매매와 검투사 경기 등으로 검은 부를 쌓은 크라수스에 의해 진압되고 크라수스의 진압 군은 반란군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십자가 형으로 매달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도망간 남은 세력들은 결국 폼페이우스 군대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어 스파르타쿠스의 난은 2년 만에 종결됩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난 후로도 한동안 검투사 경기는 계속 되는데 종종 기독교인들이 검투사 경기의 잔인 성과 폭력성을 폭로하기도 합니다.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가 된 4세기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검투사 경기는 폐지되고 검투사 양성소도 사라지게 됩니다.
2. 로마 이야기
BC 60년 경 로마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하여 군사 천재인 폼페이우스와 그 시대의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제 1차 삼두정치를 시작합니다.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관장했고 크라수스는 재정을 카이사르는 정치를 맡았습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통해 아프리카를, 폼페이우스를 통해 오리엔트 세계를, 그리고 카이사르를 통해 지금의 서유럽을 얻게 됨으로 로마 제국의 영토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 의해 가장 크게 확장되어 지중해 전체를 로마의 호수로 삼는 대 제국을 이룩하게 됩니다.
1) 폼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패배를 모르는 최고의 명장 이었습니다. 그는 지중해 해적들을 소탕했고 시리아도 점령하고 BC 63년에는 예루살렘을 함락했습니다. 그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동방 원정은 로마를 세계적 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BC 61년 9월 29일 그의 생일날 폼페이우스는 그의 생애 최고의 승전개선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도망하였고 그곳에서 이집트 왕에게 살해 당합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BC 48년 9월 29일 이날 또한 그의 생일날이었습니다.
2) 크라수스
로마의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는 카이사르뿐 아니라 로마의 모든 정치가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자입니다. 그는 돈으로 카이사르와 친분이 있게 되었고 카이사르의 권유로 삼두정치에 참여 하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 총독이 되어 나갈 때 그 동안 카이사르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빚쟁이들이 카이사르의 가는 길을 막아 서지요. 그때 돈을 가장 많이 빌려주었던 크라수스가 나섭니다. "여러분 카이사르가 총독 일을 할 수 있도록 보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돈을 벌어와 여러분의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크라수스의 말에 빚쟁이들은 카이사르를 보내주었고 크라수스의 말대로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 8년 만에 그 빚을 다 갚아버리게 되지요. 그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것은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겠지요.
크라수스는 돈과 권력 모두를 가졌지만 자신도 전쟁 영웅의 소리를 듣고 싶어 했는지 유프라테스 지역의 파르티아 제국을 치러갔다가 오히려 자신이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크라수스가 노예장사로 돈을 벌었다는 것을 알게 된 파르티아 군인들이 그의 목에 뜨거운 황금 녹인 물을 부어서 죽였다고 합니다.
3) 카이사르
로마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을 남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로마의 대표 명장입니다. 폼페이우스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점령했다면 카이사르는 서북유럽 갈리아(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원정에 성공합니다. 영국까지 로마의 영토로 만들어 버립니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서 죽자 원로원들은 연로한 폼페이우스를 최고 지도자도 선택합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에게는 모든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라고 명령합니다. 선택에 기로에 놓인 카이사르는 4개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인이 로마로 쳐들어가는 반란을 선택합니다. 그는 강을 건너며 외칩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let the dice be cast!)
카이사르군대가 루비콩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들은 원로원들과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합니다. 로마를 점령한 카이사르는 바로 이집트로 향합니다. 이집트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그곳에서 남편과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와 만나게 됩니다.
남편 프톨레미 13세와 다툼을 보이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스스로 카펫을 자기 몸에 둘둘 말게 해서 카이사르에게 선물로 보내지게 합니다. 카이사르가 카펫을 펼치자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나왔다는 뭐 이런 이야기 입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게 됩니다.
또한 흑해 근처의 폰토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왕에게 승리를 거두고 로마 원로원에 짧은 승전 편지를 보냅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mi. Vidi. Vici!)
이렇게 로마의 내정을 평정한 카이사르가 1인 지배자가 됩니다. 카이사르를 못마땅해 한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손에서 로마를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암살을 계획합니다.
BC 44년 원로원 회의에 들어가던 카이사르는 원로원 옹호파에 의해 바로 폼페이우스 입상 아래에서 암살 당합니다. 그 자리에 그가 아들처럼 아꼈던 브루투스도 있었습니다.
"브루투스 너마저도!"(et tu. Brute)
이렇게 죽을 때 브루투스에게 했던 말은 카이사르가 직접 말한 것 이라 기 보다는 세익스피어가 쓴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나온 말이라고 전합니다.
다음에도 로마 이야기 계속 됩니다.
참고 : 기도교로 보는 세계역사. 어성경. 성경통독